작성일 : 11-05-17 17:06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고 외치는 사연 <김용숙>
 글쓴이 : 아나기
조회 : 4,388  

하던 사업이 망해서 살던 집을 꼼짝없이 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 느닷없이 양도소득세 8,500만원이 부과된 것입니다. 정말 코가 막히고 귀가 막혀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남편이 세무서에 다니는 친구에게 상의를 한 결과 "너 이거 재판하면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하더랍니다. 그 말에 실낫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판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이전까지의 생각은 국가의 명령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요.)

재판을 하려면 변호사를 사야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나 사업이 망해서 변호사를 수임할 형편이 못되니 하는 수 없이 아는 분의 신세를 살짝 지기로 했습니다. 다름 아닌 고 노무현대통령님을 1989년경부터 알고 지내던 터여서 찾아뵙고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변호사를 정식으로 수임하지 않고 소장만 작성해 주고 재판은 직접 내가 하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이론에만 밝아서 교수도 아닌데 교수로 불리는 사람으로 그의 사전에는 다툼이나 싸움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집 가정사의 대부분은 내가 행동대장을 밑고 있답니다. 재판문제도 마찬가지구요. 남편은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세무서에 다니는 친구가 이길 수 있다고 조언한 내용을 미리 포기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못 먹어도 GO. 법은 상식이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과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재판에 임했습니다. 법의 'ㅂ'자도 모르는 아줌마가 생전 처음 재판을 하자니 전문가들은 한방에 해 치우는 일을 십 수번만에 해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고달프고 내 자신 한심스러워서 그 자리에 주저 앉기를 여러 번했으나, 8,500만원이라는 엄청난 돈이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돈은 서민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거든요.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

은 공무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였습니다. 민사재판은 서류재판으로 관공서에서 발급하는 서류가 가장 효과적인 서류인데 서류를 요청할 때마다 번번히 거절당하기 일수였습니다. (내게 꼭 필요한 서류는 일반증명서종류가 아닌 공무원의 노력을 요하는 특별한 서류이기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요청한 서류는 없다. 또는 발급이 불가능한 서류라고 하기에 안되고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왜 안되고? 왜 없지?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해서 구청에 가서 왜 안되고 왜 없는지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궁금증이 생기니 따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더군요. 처음에는 조용조용히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은 역시 안된다였습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높여서 "야, 왜 안되냐! 안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 해봐!!" 구청 사무실이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참았던 화가 나도 모르게 한 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지요. 사무실직원과 민원인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계장(당시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계장인 것 같음)같은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 와서 자초지정을 물었습니다. 이만저만하고 여차저차한 과정이야기를 했더니 사무실 안으로 나를 안내해서 잠시 기다리게 하더니 10분도 채 안되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서류가 내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 서류는 재판을 이기는데 결정적인 서류였습니다. 지 일이 아니면 나 몰라라하는 공무원들의 발칙한 태도. 서류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한국에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깡패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후 나 스스로 깡패아줌마라는 체면을 걸면서 살라가고 있습니다. 아나기활동을 해 가는 고비고비마다 깡패아줌마근성이 나타나곤 합니다. 한편 생각하면 깡패아줌마로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몰라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 사회가 맑아 질 수 있다는 신앙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또렷해져야 국민을 우습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집을 팔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모랐던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내 인생의 경로를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만약 억울하다는 생각만 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신세 한탄만 했다면 세금폭탄을 그대로 맞았을 것이고, 내 권리는 고스란히 국가에 받쳤을 겁니다.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무지렁이 아줌마취급을 받아가면서 눈물겨운 투쟁 끝에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리를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어제의 김용숙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줌마 김용숙이 되었습니다. 김용숙만세를 불렸습니다. 겨어제적인 영유가 있어서 변호사를 수임했다면 경험해 볼 수 없는 소중한 겅혐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을 몰라서 억울함에 굴복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을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초를 서리라. 아줌마들이 깨어나야 억울함이 없는 사회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보초를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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