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5-17 17:03
참여연대에서 퇴출 당한 아줌마 <김용숙>
 글쓴이 : 아나기
조회 : 4,392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와의 인연은 재판문제로 고민하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재판문제상담을 마치고 나서 박변호사님왈 재판은 자신이 도와 줄터이니 참여연대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참여연대가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시민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순도 100% 아줌였으니 무슨 일을 함께 하자는 것인지는 알 턱이 없었지요. 다만 재판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고마운 마음에 거절할 상황이 못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13년간 하던 사업이 망해서 실업자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몸이 근질근질해 질 무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별 고민 없이 참여연대에서 일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용산역 앞에 위치한 참여연대사무실까지 집에서 버스로 출퇴근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 20여년 가까이 자동차를 타던 버릇 때문에 출근시간에 맞춰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출근은 시작했으나 책상 하나 변변이 없고 좁디좁은 박원순변호사방 귀퉁에 있는 책상이라 하기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책상에 앉아서 지루함으로 몸을 비비 꼬다가 별로 한 일도 없이 퇴근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야 말로 오락가락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쩌다 회의에 참석해도 이방인취급을 당하는 어색한 분위기에 회의내용도 한국어가 분명함에도 내용을 알아 들을 수 없는 난해한 대화들이 오갔습니다.

이러한 고달픔의 세월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으나 사무실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탓에 책임의식 또한 매우 빈약해서 사무실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2주여를 무단 결석하는 등 사무실에 이런저런 민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한지 얼마 안되어서 사무국 직원들에게 3개월간 봉급을 못 주는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박원순변호사가 고심 끝에 만들어낸 프로젝트가 저명인사애장품전을 통해서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사업국장을 맡고 있던 내가 사업실무국장이 되었습니다. 박변호사의 아이디어를 충실히 실행한 결과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3천만원이 목표였는데 2억7천만원 정도를 모금했으니. 물론 성공의 7,80%이상은 박변호사님이 평소 가지고 있던 설득력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 인해서 참여연대에 어느 정도 정을 부치게 되었고, 시민운동에 대한 개념도 생기기 시작할 무렵 슬슬 일을 저지레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상근자들이 영웅으로 떠 받드는 이들이 진정한 영웅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이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문제점까지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그들에게 묻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가치를 흔들어대니 참여연대에서 온전하기를 거부한 행위라고나 할까요. 제대로 의식화도 되지 못한 아줌마가 동물적 감각에 의지한 이야기를 툭툭 쏟아냈으니 그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나이 많은 아줌마하고 싸우지도 못하고.

이것한 것들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 나는 참여연대에서 퇴출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를 퇴출하고도 퇴출시킨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그들은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 참여연대에서 잘렸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니 그들이 오히려 난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참여연대관계자로부터 내가 업무에 불성실하고 참여연대를 팔아서 내 이익을 챙기기 때문에 해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내 인내심에 한계를 고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나 홀로 재판했던 솜씨를 발휘해서 참여연대 사무처장 앞으로 질의서를 냈습니다. 질의서나 내용증명은 평소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나만의 업무해결방법입니다. 내용인즉 나를 무단해고한 이유를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묵묵부답. 재차 질의서를 냈으나 또 묵묵부답. 해서 아직까지 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다만 박원순변호사가 참여연대를 이미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참여연대를 대표해서 미안함을 표했기에 묻어 두기로 했습니다.

1997, 8년에 내가 지적했던 사실들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어서 그 때의 억울함을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전문성보다 객관성과 이성적 판단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의미가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대목입니다. 대중을 위하는 것이 개인을 위하는 것이지, 개인을 위하는 것은 대중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NGO활동을 평생의 내 일로 생각하고 하고 있는 지금, 참여연대에서 잘린 것이 일시적인 아픔이기는 했으나 인생의 또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에 위기를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음을 몸소 체험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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